타이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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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7-12-23 23:05 조회201회 댓글0건본문
타이족은 중국 남부에서부터 라오스, 타이, 미얀마, 말레이반도 등에 걸쳐 광범위하게 분포한다. 타이족의 기원은 분명하지 않으나, 한족(漢族)의 남진에 의해 중국의 양쯔강 남부에서 인도차이나반도로 이동하여 왔다는 설이 유력하다. 중국 윈난[雲南]의 남소국(南詔國)이 타이족이 최초로 세운 국가라는 설이 있으나 반론도 많다. 최근 타이 북동쪽 메콩강 연안에서 BC 5,000년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청동기 문화의 유적이 발견되어 타이족의 계속 거주설을 주장하는 학자도 있어 논쟁이 일고 있다.
13세기에 이 지역에 먼저 거주하던 몬족과 크메르족이 쇠퇴하자 치앙마이를 수도로 정한 북부 타이의 랑나타이 왕국(타이유안족), 수코타이를 수도로 정한 중부 타이의 수코타이 왕국(시암족), 라오스와 동북 타이에 걸친 란산 왕국(라오족) 등 타이 민족의 소왕국이 각지에 생겨났다. 그 중 랑나타이 왕국은 19세기 말까지 지속되었다. 그러나 타이 역사상 정통 왕조는 수코타이 왕조(1257~1350)를 꼽는다. 수코타이 왕조의 제3대 람캄행왕(재위 1277~1317)은 영토를 넓히고 크메르 문자를 개량하여 타이 문자 표기법을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수코타이 왕조에 이어 아유타야 왕조(1350∼1767)는 각종 제도를 정비하여 강력한 중앙집권체제를 구축하였다. 17세기에 아유타야는 무역항으로 번창하여 왕실의 독점무역체제를 갖추고 서양 여러 나라 및 중국·일본 등과 교역하였다. 16세기 후반 미얀마군(軍)에 점령당하였으나 나레수엔왕(재위:1590∼1605)이 왕조를 부흥시켰다. 그 후 1767년에 다시 미얀마 군대에 점령당했으나 아유타야 왕조의 무장(武將) 프라야 탁신[鄭昭]이 미얀마를 격파하고 톤부리 왕조를 세웠다.
그러나 톤부리 왕조는 1대(代)로 끝나고, 그 부하인 장군 차크리가 1782년에 방콕에서 왕조를 창시하였다. 이것이 지금의 차크리 왕조(방콕왕조)이다. 19세기에 들어서자 유럽 열강들의 압력이 드세어져 1855년에 영국과 보링 조약을 맺고 자유무역항과 치외법권을 승인하였다. 출랄롱코른왕(라마 5세)은 사법·행정제도 개혁과 함께 근대화를 실행하고 영국과 프랑스의 대립을 이용하여 식민지화의 위기를 벗어났다. 그 뒤 왕족 전제(專制)에 의한 정치적 부패에 불만이 높아지자 1932년 6월 24일 인민당이 무혈 쿠데타를 일으켜 성공, 12월에 헌법을 공포하고 입헌군주국으로서 발족하였다.
타이는 아시아 각국이 서구 열강의 식민지가 되었던 시기에 유일하게 독립을 유지한 나라이다. 1939년에는 국호를 시암에서 타이로 변경하였다. 정치적으로는 인민당 내부의 분쟁으로 정권교체가 잇달았는데,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총리 피분이 일본에 협력하였고 전후에는 항일 자유태국운동을 지도하였던 프리디, 아파이원 등이 정권을 장악하였다. 1947년에 피분파(派)가 쿠데타로 프리디 등을 추방하고 군부가 정권을 장악했으나 군부 내에서 파오파(派:경찰)와 사리트파(육군)의 대립이 심해졌다. 1957년 9월 사리트는 쿠데타로 피분과 파오를 쫓아내고 1958년 10월 다시 쿠데타를 일으켜 의회와 모든 정권을 해산, 군정을 실시하였다. 사리트가 죽은 뒤 정권을 인계받은 타놈은 1968년 민정으로 이양하였으나 1971년 다시 쿠데타를 일으켜 군정으로 환원시켰다.
1973년 12월 국왕은 학생·시민의 반정부 시위로 사임한 타놈의 뒤를 이어 타마사트대학 학장 산야를 총리로 임명하였다. 산야 정권은 새로운 헌법을 제정하고 총선거를 실시하는 한편 언론검열의 철폐, 농지개혁법의 제정 등 의욕적인 정책을 실시하였으나 좌우파(左右派)의 대립, 빈발하는 파업 등으로 국민적 통합을 이루지 못한 채 1975년 2월 반정부 폭동으로 물러났다. 그 후 쿠크리트와 세니의 민간 내각이 성립되었으나 석유파동 후의 경제정세 악화, 인도차이나의 공산화에 따른 위기의식 고조 등으로 정치정세의 불안이 계속되었다. 1976년 10월에는 군부가 타놈의 귀국을 반대하는 학생시위를 제압한 데 이어, 민간정부를 뒤엎고 타닌을 총리로 하는 새 내각을 발족시켰으나, 1977년 10월 국방장관 겸 최고사령관 크리앙사크가 타닌을 축출하고 총리에 취임하여 1978년 새 헌법을 제정하였다. 그러나 1980년 2월 야당이 제출한 불신임안으로 사퇴하였고, 국방장관 프렘이 총리에 취임하였다.
이렇게 하여 1980년대이후 군부의 정치적 영향력이 계속되는 듯이 보였지만, 군부내의 과거와 같은 강력한 세력가나 파벌이 약화되고 이로 인해 소규모 파벌주의와 분열은 심화되었다. 예를 들면 1981년과 1985년에 연이어 군부에 의해 쿠데타가 발생하였으나 경쟁파벌의 견제로 쿠데타는 실패로 끝났다. 그렇지만 군부의 정치적 개입은 쿠데타 뿐만 아니라 헌법개정, 밧화 평가절하 반대화 같은 정부정책에 대한 개입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이루어졌다. 1980년대의 군의 정치개입은 정당 창당의 형태로도 이어졌다. 과거 쿠데타의 주동인물이나 쿠데타 분쇄의 주동인물들은 그들간의 갈등을 만들어 내면서 정당을 만들기도 하였는데, 짬렁은 1988년에 세운 팔랑탐 당을, 차왈릿은 1990년에 만든 쾀왕마이 당을 만들었다.
1988년에 실시된 총선의 결과는 태국 민주주의와 정당정치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기업가출신이 다수를 이루는 찻타이 당이 선거에 압승하여 제1당 당수인 찻차이가 총리가 되었다. 당시 헌법상 총리는 반드시 정당출신이거나 하원의원출신일 필요는 없어서 국방부실세가 임명되는 관례를 깨고 민선하원 의원출신이 총리가 된 것이었다. 그러나 이른바 문민정권의 기업가출신 정치인들은 군부와 갈등을 만들게 되었고, 군부의 기존이익에 반하는 군에 대한 문민통제를 시도하였던 것이 역으로 군부쿠데타를 다시 가져왔다. 이러한 와중에도 비관료세력들의 성장으로 태국의 정치체제는 전통적인 관료지배체제로만 설명될 수 없는 변화가 나타났다.
군부에 대한 전례없는 문민통제에 반발하여 일으킨 1991년의 군부쿠데타는 전 군대에 걸친 것으로 해군, 공군, 경찰까지 합세하였으며, 쿠데타세력은 군의 지속적인 정치개입이 가능하도록 새로운 헌법을 만들고 군부정당인 싸막키탐 당을 만들어 제1당 당수인 쑤친다가 수상이 되었다. 그러나 이는 다시 대규모의 국민적 저항을 가져와 1992년 5월의 민주화운동을 불러왔다. 직업외교관 출신의 아난이 수상에 임명되면서 민주화운동발발 당시의 진압책임자에 대한 문책이 이루어지고 군개혁작업이 일어나 군부의 정치적 영향력을 현저히 약화시켰다. 이후 군은 정치적 중립이 선언되었으며, 군도 정치적 성향을 벗고 과거보다 훨씬 직업주의화되는 경향을 보이게 되었다.
1992년 5월 민주화운동은 역사상 매우 비극적인 유혈사태를 가져왔지만 시민의 힘에 의해 군부정권을 퇴진시키고 문민정권이 다시 등장시켰다는 점에서 역사적 중요성을 가지며, 이를 기점으로 태국의 정당정치가 활성화되었다. 또한 정치, 경제 측면의 개혁에 대한 시민의 요구가 강력해지면 저항적 시위도 많아졌는데, 1997년 아시아의 외환위기는 경제위기를 가져와 수많은 데모와 군중시위가 일어났다. 경제위기의 와중에 국민의 권리확대, 부정부패 척결, 군부의 영향력 제거 등 다양한 사회적 요구를 담고 있는 신헌법이 의회를 통과함으로써 전통적인 관료지배체제에서 벗어나 상당한 정치적 민주화를 이루게 된다.
1997년 개헌으로 2000년 3월 임명직 상원이 해산되는 등 제도상의 변화가 나타났으며, 2001년 6월 6일 선거에서 탁신이 만든 새 정당인 타이락타이당이 전국적인 승리를 거두면서 탁신은 총리가 되었다. 탁신총리는 경제적으로 성공한 기업인출신으로 집권초기 신임을 받았으나 본인의 부정부패가 문제가 되면서 2006년 쿠데타를 불러왔다. 15년만에 다시 발발한 군부쿠데타는 태국 문민정치가 아직 미성숙 되어 있고, 60년 이상 계속된 군부의 정치·사회적 영향력이 여전히 건재함을 보여주는 단면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타이의 역사 (두산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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